특허권의 기간 연장

    (가) FTA의 사례와 트립스 협정의 규정


    특 허권을 취득하려면 등록 여부에 대한 특허청의 심사를 거친 후 등록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처럼 특허권은 행정청인 특허청이 심사를 한 후 특허를 허여한다는 결정을 하고, 출원인이 등록이라는 요식 행위를 해야 발생하는 권리라는 점에서, 창작과 동시에 권리가 발생하는 저작권과 차이가 있다.  특허권은 등록이 되어야 권리 행사를 할 수 있으나, 권리가 존속하는 기간은 특허를 출원한 때부터 계산해서 20년까지이다.


    미 국이 체결한 FTA에는 특허청의 심사에 장기간이 걸린 경우 그 기간만큼 특허권의 존속 기간을 연장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미국-칠레 FTA는 특허를 허여한다는 결정이 출원일로부터 5년 또는 심사청구일로부터 3년이 걸린 경우 특허 기간 연장을 해야 하고(제17.9조 제6항), 미국-싱가포르 FTA는 출원일로부터 4년 또는 심사청구일로부터 2년(제16.7조 제7항), CAFTA는 출원일로부터 5년 또는 심사청구일로부터 3년(제15.9조 제7항), 미국-모로코 FTA는 출원일로부터 4년 또는 심사청구일로부터 2년(제15.9조 제7항), 미국-호주 FTA는 출원일로부터 4년 또는 심사청구일로부터 2년(제17.9조 제8(a)항), 미국-바레인 FTA는 출원일로부터 4년 또는 심사청구일로부터 2년이 걸린 경우에 특허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


    트 립스 협정은 특허권이 출원일로부터 20년이 되기 전에는 소멸하지 않는다고 하여 존속기간의 만료시점만 정할 뿐 특허권의 존속 기간 연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즉, 미국이 다른 나라와 체결한 FTA에서 심사 지연에 대한 특허권의 기간 연장 규정을 둔 것은 트립스 협정과는 무관하며 미국 특허법의 규정을 차용한 것이다.  미국은 1999년에 특허법을 개정하여 출원인에게 책임이 없는 사유로 특허심사 처리 기간이 3년을 넘는 경우 초과 기간만큼 특허권의 기간을 연장하는 제도를 만들었다(미국 특허법 제154조 제(b)(1)(B)항).  그런데, 미국이 체결한 FTA를 보면, 미국법의 심사지연 3년 보다 더 짧은 2년을 특허권 기간 연장의 근거로 한 사례가 더 많다.


    (나) 특허권 존속 기간 연장의 문제점


    ①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 제도


    미 국이 체결한 FTA 사례와 같이 심사청구일로부터 2년 또는 3년 이상의 심사 기간이 걸린 경우 특허권의 기간을 연장하는 제도를 도입하면,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특허권이 연장되는 결과가 생긴다.  왜냐하면, 한국 특허청의 심사 처리 기간이 평균 3년 가까이 걸리기 때문이다.  특허청이 발행한 ‘2005년 지식재산백서’에 따르면, 한국 특허청의 ‘1차 심사처리 기간’은 2002년 22.6개월, 2003년 22.1개월, 2004년 21.0개월이다.  여기서 ‘1차 심사처리 기간’이란 출원인이 심사청구를 한 날로부터 특허청 심사관이 최초로 심사결과를 통지한 때까지를 말하며, 이 기간은 출원인에게 아무런 책임 없이 걸린 기간이다.  1차 심사처리 후에도 출원인의 의견을 검토하거나 2차 심사 결과를 통지하는 등의 절차가 따르므로, 특허를 허여한다는 최종 심사처리가 이루어지는 시점까지는 심사청구일로부터 보통 3년이 걸린다.  따라서 심사지연으로 인한 특허권 기간 연장 제도를 한국에 도입할 경우 특허권은 출원일로부터 20년이 경과하면 소멸한다는 원칙은 없어지고, 대부분의 특허권이 기간 연장되는 원칙과 예외가 뒤바뀌는 결과가 된다.  즉, 현재 한국 특허청의 심사능력으로는 심사 지연으로 인한 특허권 존속 기간 연장 제도를 도입할 수 없다.


    ② 부실 권리의 양산 문제


    더 큰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특허청이 심사 지연을 줄이기 위해 심사처리 기간을 단축할 경우 부실 권리가 양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허청이 평균 3년에 가까운 심사 처리 기간을 거쳐 등록한 특허의 약 30%가 나중에 잘못 등록된 것이라고 밝혀졌다.  이러한 통계만 보더라도 등록된 특허의 유효성 그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심사 기간을 단축하면 부실한 심사로 이어지고 등록특허의 신뢰성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또한, 현재 특허청 심사관의 1인당 연간 처리 건수가 미국의 경우 70여건이지만 한국은 이보다 5배나 많은 350여건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특허심사의 품질을 높이기 위한 특별한 조치 없이 심사처리 기간만 단축하는 것은 부실한 특허권를 더 많이 양산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 처럼 한국 특허청의 심사 품질이 형편없는 주된 이유는 바로 특허출원이 남발되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특허출원 건수는 급속하게 증가하여 2004년 한해에만 14만 건의 특허가 출원되었고, 현재 등록되어 있는 특허권의 수는 약 100만 건에 달한다.  그런데, 이 중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는 소위 ‘잠자는 특허’가 무려 66.8%에 달한다.  2005년 한국 특허청의 통계에 따르면, 등록된 특허의 사업화율은 고작 33.2%에 불과하고 사업화의 성공률도 18%에 지나지 않는다.  특허권은 독점권이기 때문에 어느 기술에 특허권이 설정되어 있으면 다른 자는 이 기술을 이용할 수 없는데 특허권자 스스로도 사용하지 않는 기술이 독점권으로만 등록되어 있다면 사회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러한 ‘잠자는 특허’가 많은 이유는 대기업들이 특허권의 숫자를 기업 홍보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허청이 특허출원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 왔기 때문이다.


    ③ 보완 장치의 마련


    특 허권의 보호기간을 출원일로부터 20년이 지나면 종료하도록 한 것은 권리의 소멸 시점을 일률적으로 정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제3자는 어느 기술이 특허 등록 되었더라도 출원일로부터 20년이 지나면 그 기술은 공공영역으로 편입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이를 사용할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런데, 특허청의 심사지연으로 인하여 권리 기간이 늘어나서 이러한 기대가 무너지고 그 불이익을 사회 전체가 부담하도록 하는 것은 문제이다.  또한, 특허 심사 기간을 단축하여 빨리 권리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확한 심사를 통하여 부실한 권리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심사기간의 지연으로 인한 특허권자의 불이익을 보상하는 제도를 만들려면 다음과 같은 보완 장치와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


    (i) 출원일로부터 20년이 경과한 후에도 예외 적용을 받아 권리 기간이 연장된 경우에는 보상금 지급을 전제로 누구나 특허발명을 이용할 수 있도록 특허권의 성격을 바꿀 필요가 있다.


    (ii) 심사 지연으로 인해 권리가 연장된 기간 동안에는 보상금 지급을 전제로 특허발명의 강제실시를 제3자가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iii) 과거 한국 특허법에는 특허청 심사관이 특허등록을 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누구나 이의신청을 하여 심사관의 판단을 다툴 수 있는 이의신청제도를 두고 있었다.  일종의 공중심사 제도를 두어 부실한 권리가 등록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1997년에 개정된 특허법은 특허권이 빨리 등록되도록 한다는 목적으로 이의신청을 등록 후에만 가능하도록 변경하였고, 2006년 2월에 개정된 특허법은 이러한 이의신청 제도 자체를 폐지하였다.  심사 지연으로 인한 권리 연장을 보장하는 제도를 도입한다면, 공중 심사를 통한 부실 권리의 등록을 막는 장치인 등록 전 이의신청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