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문] 지적재산권 강화가 선진화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자!
지적재산권 강화가 선진화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자!
강정명 (정보공유연대 IPLeft)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8차 협상이 8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개막한다. 이번 협상을 끝으로 대규모 협상단이 참여하는 본 협상이 사실상 마무리됨에 따라 농산물과 자동차, 의약, 무역구제, 저작권 등 핵심 쟁점의 타결을 위해 최대한 유연성을 발휘한다는 것이 양쪽 협상단의 입장이다.
의약품과 관련해서는 김종훈 한미FTA 수석대표가 2월'최고경영자 신춘포럼'에서 의약품분야에 대한 미국측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 데 이어 외교부 통상교섭본부가 국회 FTA 특위에 보고한 '한미FTA 7차 협상 대응방향'에서도 무역구제와 의약품을 연계하겠다는 소위 빅딜 전략을 공식화한 바 있다.
미국은 저작권을 사후 50년에서 70년으로 늘려달라는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지적재산권 분과장으로 종전보다 고위직인 USTR 지재권 대표보를 참여시킬 방침이다.
협상이 타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진 시점이지만, 이제라도 한미FTA가 가져올 엄청난 영향을 생각하면 다시금 우려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FTA 추진을 찬성하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다수 있다. 특히 지적재산권과 관련해서는, 한미FTA 추진을 지원하기 위한 민간기구인 한미FTA 민간대책위원회가 홈페이지(www.yesfta.or.kr) 에서 소위 '균형잡힌' 시각으로 소개하고 있는 김국진 미디어미래연구소장의 "한미FTA, 저작권 수출 위한 발판", 김명곤 문화관광부장관의 "한미FTA를 문화산업 도약의 계기로", 이대희 인하대 교수의 "저작권과 한미FTA" 등이 있다.
각 글의 요지는 대강 이렇다. 지적재산권의 강력한 보호는 대세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 당장 불리한 측면만 보지 말고 한미FTA를 통해 강력한 지적재산권 보호 체계를 갖추고 이를 문화산업 성장의 발판으로 삼자는 것이다. 특히, 21세기 정보화사회에서 선진 한국 건설을 위하여 지적재산권의 강력한 보호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이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것은 한류의 보호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지적재산권 보호하라고 큰 소리치려면 우리부터 세계적 수준의 강력한 보호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원중 산업재산정책본부장이 지난해 9월 국정브리핑에 쓴 '한미FTA 협상에서 지재권을 왜 다루냐고요?"도 비슷한 내용이다. 1995년 WTO/TRIPs 출범 이후 지적재산권을 통상협상의 대상으로 다루는 것은 이미 보편화되었느니, 한미FTA에서 지적재산권 이슈가 포함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이 기회에 우리 지적재산권 제도를 선진화할 수 있으며, 우리의 지적재산권 침해가 빈발하는 국가들과의 FTA에서 그 선진화된 지적재산권 제도의 도입을 요구하여 우리 지적재산권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지적재산권을 강화해야만 기술이나 문화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듯하다. 국내 업계의견도 과연 같을까?
제 약협회는 6일 8차 협상을 앞두고 외교통상부 김종훈수석본부장과 면담, 의약품을 희생양으로 삼는 빅딜방식을 추진할 경우 국내 제약산업은 고사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미국측은 한미FTA협상에서 국내 제약산업을 고사시킴으로써 항구적 이익을 취하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으며 제약산업이 고사될 경우 국민의 약제비 부담은 폭증할 것이며, 정부가 약가통제권을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상실하고 건강보험재정 안정에도 차질을 빚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도 지난해 한미FTA 협상과 관련, 지적재산권 문제는 국제 조약에서 정한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한 해당국가의 법 정책에 따라야 할 문제지 무역 거래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미국문화자본의 로열티 회수 기간 확대를 위한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은 한국의 출판 및 학문 발전을 저해한다는 입장을 발표한 바 있었다.
제 약협회나 대한출판문화협의의 의견을 집단이기주의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특허제도가 기술혁신에 기여하는가에 대한 실증적 연구결과는 나뉘어 있다. 특히 전자분야의 경우에는 특허제도가 기술혁신에 기여한다는 증거는 없다는 연구가 다수이다. 미국의 의사와 과학자들은 지나친 지적재산권 보호가 오히려 학술연구에 장애가 된다는 비판을 하고 있는 판이다.
찬성론자들은 지적재산권을 강화해야 ‘선진’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찬성론자의 주장에는 암묵적으로 지적재산권을 강력히 보호하는 것이 우리 국민 모두가 잘 사는 길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그 러나 미국의 예를 보자. 세계무역기구협정에 지적재산권을 포함시키면서 미국 제약업계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왔다. 하지만 미국의 국민들은 비싼 약값으로 고통받고 있다. 1990과 2000년 사이에 미국 브랜드 약에 대한 소비는 403억 달러에서 1조 218억 달러로 3배 증가하고, 멕시코로 일반약을 구입하려는 미국 시민들의 특별한 버스 여행이 유행한다고 한다. 1984년과 2001년 사이에 경제 전체의 소비자 물가지수는 70% 상승률을 보였으나, 정기간행물에 대한 도서관 가입비용은 법률분야는 205%가 상승했고, 의약분야 정기간행물은 479%, 물리화학분야는 615%가 상승했다.
따라서 이미 기술적, 문화적 우위에 있는 기업들이 지적재산권 강화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해도, 그 혜택이 국민 모두의 것으로 돌아가리라고 막연히 전망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찬 성론자들은 또한 우리 지적재산권 제도를 선진화해서 제3국에 이식하고 이를 통해 우리 지적재산권을 보호받자고도 주장한다. 정부는 계속해서 한류를 이유로 지적재산권 강화가 이유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저작권 보호기간 사후 70년까지 보호를 주장할 수 있는 한류 상품이 있는가 말이다. 우리 기업 중에서 특허권 보호기간을 2-3년 더 연장해 달라고 요구한 기업이 있는가 말이다. 현재 우리 지적재산권 제도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도 제3국에서 우리 문화상품의 권리 보호는 충분히 주장할 수 있다.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우리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런 논리적 연관도 없다.
저작권 보호기간을 연장하려는 미국의 의도는 미키마우스와 같은 미국 캐릭터 산업의 이윤 확대에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저작자 사후 50년도 길다. 그 이상 보호를 주장할 저작물이 얼마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과연 저작자 생존기간과 그후 70년간 독점을 인정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한 것인지는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 특허권 분야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허보호기간 연장은 미국 제약사를 위한 것이다. 강제실시권 요건을 제한하는 문제도 그렇다. 공공정책상 필요하면 강제실시권을 발동해서 특허권자의 권리도 예외적으로 제한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사실상 봉쇄하는 미국의 요구를 두고 선진화라고 이야기하면 할 말이 없다. 미국이 요구하는 법정손해배상제도 등도 우리 민사법 체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미국의 제도이면 다 선진화인가? 무엇이 선진화인지, 왜 그것이 선진화로 평가될 수 있는지 찬성론자들은 전혀 밝히지 않는 채 근거없는 선동만 늘어놓고 있다.
우리 법체계와 어울리지 않는 벌칙제도나 우리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권리기간 연장 등의 미국 요구는 절대 받아드려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요구의 수용을 전제로 하는 한미FTA 협상은 중단되어야 한다.